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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태우 의사

Army 오기 전에 2013. 2. 8. 16:13

 

 

원태우(1882~1950)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에 의해 죽었다고 하더라도, 그 시초는 이미 원태우로부터 있었다"

(애국지사,한학자 송상도 선생의 원태우 의거에 대한 평가)

원태우(元泰祐, 1882년 3월 4일 ~ 1950년)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거사를 준비했다.

때마침 이토 히로부미가 수원 관광을 다녀온 후 서울로 되돌아간다는 첩보를 입수한 원태우는 안양에서 진을 치고 이토 히로부미가 탄 열차를 전복시키기 위해 레일에 바위를 깔아놓는 것을 시도했으나 겁을 먹은 이만려가 바위를 치웠기 때문에 실패했다.

그래도 원태우는 어떻게든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기 위해 돌을 들고 안양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이토 히로부미가 탄 열차가 지나가자 이토 히로부미에게 돌을 던졌다.

원태우가 던진 돌은 이토 히로부미가 탄 열차의 창문을 깨고 정확하게 이토 히로부미의 머리에 명중되었으며 이때 깨진 유리파편 중 8조각이 이토 히로부미의 얼굴에 박혔다.

이토 히로부미는 뇌진탕을 일으키는 등 생명이 위독한 상태가 되었으나 급하게 치료를 받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원태우는 현장에서 바로 체포되었으며 이 사건은 전 일본을 떠들썩하게 만들어 놓았다.

이후 원태우는 감옥에서 모진 고문을 겪었다.

온몸에 고문으로 인한 상처자국이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매우 가혹한 고문을 당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안중근 등 이토 히로부미의 암살을 시도하는 사람이 계속 생겨나게 되었으며 한반도에서 독립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후 원태우는 일제의 혹독한 감시와 착취로 인하여 매우 힘겹게 살아가다가 해방을 맞이했다.

그 후 원태우는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사망했다. 향년 69세.

출처 -위키백과.

 

 

 

원태우 지사는 안양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평범한 농부였다.

그는 유난히 돌을 잘 다뤘다.

특히 돌을 잘다뤄 절구나 맷돌같은 기구를 잘 만들던 평범한 농부였다.

그랬던 그를 변화시킨 계기는 1905년 을사조약으로 인하여 대한제국이 일본에 강제합병 되었다는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그래서 그는 평범한 농부가 아닌 독립운동의 정신을 가슴에 새긴 독립투사로 탈바꿈한다.

 그는 나라를 뺏긴 설움과 울분을 주체할수 없었다.

열심히 해왔던 농사일도 뒷전에 두고 나라를 빼앗은 장본인들을 처단하기 위한 일에 매진하였다.

그러던 중 원의사는 을사조약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가 수원에서 사냥을 마치고 기차로 안양을 거쳐 서울로 올라간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1905년 11월달의 일이었다.

이에 원태우 지사는 거사계획을 세우게 된다.

거사 장소는 안양의 서리재 고개..기찻길이 움푹 파인곳에 있는데다 비탈진 고개라 기차가 서행을 한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었다.

 1905년 11월 22일 원태우 지사는 마을 청년 이만려 등과 함께 기찻길에 돌멩이를 놓아 기차를 전복시킨다는 계획하에 이토가 지날시간을 기다리며 이토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토가 지나갈시간이 다다르자 조그마한 사건이 벌어졌다.

애초부터 겁을 집어먹었던 이만려가 실랑이 끝에 기찻길에 준비해놨던 돌들을 모조리 치워버리고 도망간것이었다.

 거사직전에 순식간에 벌어진일이라 원지사는 눈앞이 깜깜해졌다.

그리 멀지않은곳에서는 이토가 타고있는 기차가 지나간다는 기적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시간이 없었다.

 그 순간 원지사는 주위의 커다란 돌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기차가 지나가기 시작했다.

원의사는 이토로 보이는 인물이 타고 있는 객차에 돌을 집어던졌다.

 쨍그랑!퍽! 하는 소리와 함께 돌은 객차 유리창을 뚫고 기차안의 사내의 머리에 정확히 명중하였다.

기차 안의 사내는 바로 을사조약의 원흉 이토였다.

 머리에 돌을 맞은 이토는 얼굴 8군데에 유리파편이 박히고 뇌진탕을 일으켜 위독한 상태였으나 치료를 받아 기사회생하게 되었다.

 이윽고 멈춘 기차안에서 쏟아진 호위병력에게 체포된 원지사는 바로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였다.

온몸이 성한곳이 없을정도로 모진 고문이었다.

일본은 계속 원지사에게 배후를 대라며 모진 고문을 가하였다.

 그러나 원지사 혼자 거사를 추진하였는데 배후가 있을리 없었다.

결국 원지사는 모진 고문으로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었고 거의 죽음 직전까지 이르렀다.

그러자 일본 경찰은 1906년 1월26일 거의 반죽음 상태가 된 원지사를 석방한다.

 그러나 석방이후 원지사는 광복 때까지 무려 30여년을 불령선인으로 낙인 찍혀 일본의 요시찰 대상으로 살아가야 했다.

게다가 고문으로 성불구가 되어 평생을 후사 없이 살아야 했다.

 원지사는 30여년을 일본의 괴롭힘 속에 사시다가 광복을 맞이하였다.

그러다가 1950년 6월25일 한국 전쟁 개전일.69세를 일기로 타계하시게 된다.

 고인의 업적은 고인사망후에도 오랫동안 주목을 받지 못하다 사망 40여년이 지나서야 1990년 정부에서 애족장을 추서함으로써 세상에 제대로 알려지게 된다.

 

출처 :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kyc3095&logNo=40166449273&redirect=Dlog&widgetTypeCall=true